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랠프 월도 에머슨 (문단 편집) === [[남북 전쟁]]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랠프 월도 에머슨 1860년대 이미지.jpg|width=100%]]}}}|| || {{{#a78b74 '''《랠프 월도 에머슨》[br](1860년대. 사진.).'''}}} || 1837년 11월부터 노예제 폐지론자들인 [[찰스 섬너]] 등 친구들과 가족과 교류하면서 노예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. 그러나 에머슨은 강연에서 노예제 폐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주저했다. 하지만 1844년 그는 더 적극적으로 연설과 강연에서 노예제를 비판하게 되었고,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에 방문한 노예해방주의자 [[존 브라운]]을 만났다. 이후 [[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]] 때 [[에이브러햄 링컨]]을 뽑았지만 노예제를 바로 없애는 것보다 연방을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링컨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. [[남북전쟁]]이 터졌을 때 에머슨은 자신이 노예제를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. >'''The South calls slavery an institution... I call it destitution... Emancipation is the demand of civilization.''' >'''미국 남부는 노예제를 제도라고 부릅니다... 저는 노예제를 빈곤이라고 부릅니다. 노예 해방은 문명의 요구입니다.''' >---- >- 랠프 월도 에머슨, [[워싱턴 D.C.]] 강연, 1862년 1월 31일 [*출처2 Baker, Carlos (1996). Emerson Among the Eccentrics: A Group Portrait. New York: Viking Press. ISBN 0-670-86675-X. 433쪽] 에머슨의 친구 섬너는 에머슨이 링컨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, 에머슨의 에세이를 읽었고 에머슨의 강연을 본 적이 있는 링컨은 에머슨을 환영했으며, 에머슨은 링컨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졌다. 1865년 링컨이 암살로 죽자 초도식에서 링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연설했다. 1862년 5월 6일 에머슨의 제자 [[헨리 데이비드 소로]]가 결핵으로 죽자 소로를 위해 추도 연설을 했다. 1849년 소로가 <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>를 출판할 때 에머슨과 관계가 틀어지긴 했지만 에머슨은 소로의 추도식에서 소로를 자신의 "절친한 친구"였다고 회고했다. [*출처3 Richardson, Robert D. Jr. (1995). Emerson: The Mind on Fire. Berkeley: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. ISBN 0-520-08808-5. 548쪽] 1864년 에머슨의 다른 친구 [[나다니엘 호손]]이 죽었다. 콩코드에서 열린 호손의 장례식에서 에머슨은 호손의 관을 운구했으며, 호손을 "햇빛과 푸른 초목의 웅장함"이라고 평가했다. [*출처2 Baker, Carlos (1996). Emerson Among the Eccentrics: A Group Portrait. New York: Viking Press. ISBN 0-670-86675-X. 448쪽] 이후 에머슨은 1864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